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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연합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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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과 정비를 위한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신라 왕경(王京·옛 서라벌의 중심부) 복원·정비 사업은 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적인 정체성을 회복하고 한국문화 원류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사업은 2014년부터 2025년까지 총 12개년 사업으로 신라왕궁(월성) 복원정비 등 8개 사업을 중심으로 총사업비 9천450억원(국비 6천615억원 포함)이 투입된다.
주요 사업은 황룡사 복원(2천900억원)과 신라왕궁 복원 정비(2천700억)를 비롯해 쪽샘지구 정비(1천545억원), 동궁과 월지 복원(630억원), 신라방 발굴 정비(620억원), 월정교 복원(421억원), 첨성대 주변 발굴정비(361억원), 대형고분 재발굴·전시(273억원) 등이다.
신라 왕경 복원·정비 사업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국무총리 훈령에 따라 지난해 4월 문화재청 산하에 사업 추진단이 설치돼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문화재청 소속 과장(4급)을 단장으로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과 문화체육관광부, 경북도, 경주시 공무원 등 12명으로 구성됐다.
사업 추진단은 복원·정비 사업의 종합계획과 연차별 추진계획 수립, 복원·정비 계획 등을 마련하고 발굴사업과 복원·정비사업을 지도 관리한다.
■ 신라 문화의 정수…황룡사 복원·정비
사적 제6호인 황룡사지에 있던 신라의 사찰. 진흥왕 14년(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대궐을 사찰로 고쳐 황룡사로 하고 17년만인 569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신라 제일의 사찰로,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동서 288m, 남북 281m에 면적만 8만2천여㎡에 이른다.
황룡사의 자랑거리는 9층 목탑과 장륙존불. 이 둘은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허리띠와 함께 신라삼보에 속했다. 높이가 86m에 이르는 9층 목탑은 나라의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자장법사의 청으로 선덕여왕 12년(643년)에 건립됐다.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건축하고 석가모니 진신사리 100과를 탑 속에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탑 건립 이후 여러 차례 화재를 만나 중수를 거듭하다 고려 고종 25년(1283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황룡사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는 와중에 완전히 소실됐다.
장륙존불은 높이 5m 가량에 금과 철의 무게만 3만5007근에 이르렀을 정도로 큰 불상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9층목탑과 함께 침략으로 불타 없어져 버렸다.
이미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선행돼 왔다. 복원·정비 사업의 하나로 9층 목탑을 복원하기 위해 이미 10분의 1 모형이 제작돼 있다. 이를 통해 목탑을 비롯 중문, 회랑, 담장 등의 복원공사 2016년 착공될 예정이다.
오는 2025년 황룡사의 주요 시설인 목탑과 금당, 회랑 등이 복원되면 책에서만 접하던 황룡사의 진면목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 왕궁 속 깃든 신라사…월성 복원·정비
월성(月城)은 서기 101년 신라 5대 파사왕 때 축성을 시작해 왕궁을 옮겨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800여년간 왕궁으로 자리해온 곳이다. 800년을 넘어 왕궁으로 사용돼 왔으니 여기에 수많은 전설과 역사가 깃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월성은 신라역사의 정수로 불리기도 한다.
사적 제16호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월성은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규모는 총 면적 20만7천528㎡에 성내 면적은 10만8천524㎡에 이른다.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해서 반월성(半月城)으로도 불렸다.
동서로 폭 860m, 남북으로 폭이 250m에 총둘레는 2천400m다. 성벽의 높이는 대체로 10~20m 정도 되게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남쪽은 자연적인 절벽을 이루며 남천이 흐르고 있어 성벽을 쌓지 않았다. 성벽 외곽에는 또 석축을 하거나 목판을 이용한 해자(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 둘레에 판 도랑)도 있었다. 문무왕 때에는 월지(안압지), 임해전, 첨성대 일대가 월성에 편입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여러 문헌에 따르면 월성에는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 신하의 아침문안인사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조원전, 삼궁을 관할하던 내성, 숭례전, 왕실의 물품을 보관하는 내황전, 망은루와 월상루 등 각종 문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보물 제66호인 석빙고만 남아있다.
폐허로 내버려진 월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는 외곽지역과 해자에 국한돼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 때문에 월성 내에는 당시의 정치·경제·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다량의 유적과 유물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으로 전반적인 발굴조사와 함께 주요 전각들에 대한 복원도 함께 이루어진다.
■ 세계적 고분 공원…쪽샘지구 발굴·정비
황오동·황남동·인왕동 일대에 걸쳐 있는 신라 고분군 지구를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었고, 맛이 좋은 그 샘물을 쪽박으로 떠 마셨다고 해서 쪽샘마을이라 전해지게 됐다고 한다.
4~6세기에 걸쳐 조성된 총면적 38만4천㎡의 쪽샘지구에는 적석목곽분과 목곽묘, 석곽묘 등 15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고분의 피장자는 신라 중앙지배층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다.
2007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 금목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신라토기, 무기류가 출토됐다.
정부와 경북도·경주시는 발굴을 한 뒤 주변에 전시실과 박물관 등을 건립, 세계적인 고분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 태자 머물던 궁궐…동궁과 월지 복원·정비
신라 궁궐의 동북쪽에 있던 별궁이 동궁이고, 동궁 옆에 있는 연못이 안압지로 알려진 월지(月池)다. 동궁은 태자가 머물던 궁궐. 현재 사적 제18호로 지정돼 있다.
월지는 중국 사천성에 있는 명산인 무산의 12개 봉우리를 본 따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연못을 파서 조성됐다. 여기에 3개의 섬을 만들어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1974년 월지 준설 및 주변정화공사가 추진됐을 때 바닥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제품과 목조건물의 부재 등이 출토됐고, 특수한 모습의 기와도 적지 않게 출토됐다. 이와 함께 신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굽다리접시(高杯)나 긴목항아리(長頸壺)와는 달리 실생활에 사용됐던 토기류도 많이 출토됐다.
동궁 및 월지 유적은 1980년 정화공사를 거쳐 일부 복원됐다.
■ 계획도시 재조명…신라 ‘방리제’ 발굴·정비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는 격자 모양의 도로와 우물,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도시계획에 따른 도시조성인 셈이다.
이런 도시계획의 중심에는 행정구역의 단위인 ‘방(坊)’이 있었다. 이를 ‘방리제(坊里制)’라 한다. 동서-남북으로 직교하는 직선도로에 의해 거주공간이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격자의 형태로 구획되는 것. 현대판 도시계획인 셈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 여러 문헌에 따르면 경주는 거대도시 규모인 1천360방으로 구획됐다고 하나 다른 한편으로 360방으로 구획됐다고도 한다.
1방의 크기도 일치하는 수치는 없지만 대략 가로세로 각 160~120m로 추정된다. 방과 리(里)의 관계도 서로 상하위 개념의 행정구역이라는 설이 공존하고 있다.
■ 고대 교량 대표적 축조술…월정교 복원
‘원효대사는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 요석공주와의 스토리를 담은 월정교를 통해 원효대사는 아들 설총을 얻었다. 월정교는 왕궁인 월성과 왕경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월정교 터는 사적 제457호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의 고대 교량의 축조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신라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데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월정교는 길이 60.57m에 교각 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24절기 측정하던 천문전시관…첨성대 주변 발굴·정비
경주에 있는 여러 문화재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다.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일종의 천문대로 현존하는 첨성대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제31호로 지정됐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의 규모로 돌 361개 반을 쌓아 올렸다.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이 2단으로 짜여져 있다.
혼천의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올려놓고 춘분·추분·동지·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해 측정했고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첨성대가 제단으로 사용됐다는 이견도 있다. 신라왕경 사업의 마지막 사업인 첨성대 주변 발굴·정비 사업은 첨성대 주변을 발굴하고 심층 연구하는 한편 천문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 무덤 속 문화재 출토…대형고분 재발굴·전시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주요 대형고분은 쪽샘지구 내 44호분, 노서동 고분군 내 서봉총, 금관총, 대릉원 내 황남대총, 금척리 고분 등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가 미흡했다는 지적에 따라 대대적인 재발굴을 통해 문화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교육·연구·전시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사업의 취지다.
재발굴이 진행될 대형고분으로는 우선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서봉총을 들 수 있다. 서봉총은 스웨덴의 황태자이며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공작이 참관해 출토된 금관을 손수 채집했고, 이 금관의 관에 세 마리의 봉황 모양이 장식돼 있다.
동서 지름 약 36m에 높이 약 9.6m 규모로 1926년 발굴됐다. 금관 외에도 금·은·유리 구슬을 꿴 목걸이, 금팔찌, 금허리띠, 쇠솥, 토기, 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그러나 서봉총은 발굴 뒤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다시 묻혀버리고 말았다.
금관총은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것으로 신라의 금관이 출토돼 붙여졌다. 지름이 45m, 높이 12m 정도 규모. 1921년 가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됐다. 금관을 비롯 장신구와 무기류, 용기 등이 출토됐고, 특히 구슬 종류만 3만개가 나왔다.
여기서 출토된 금관은 국보 제87호로, 허리띠장식은 국보 제88호로 각각 지정됐다.
황남대총은 경주시내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두 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표형분(표주박처럼 이어져 있는 무덤)으로, 동서 80m, 남북 120m, 높이 22.2m와 23m에 이른다. 1973년부터 3년간 발굴됐다.
피장자는 신라왕족 부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금제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자인구와 토기, 철제무기, 마구류가 출토됐다.
금척리 고분은 서쪽 출구의 국도변 좌우에 분포해 있는 대형고분들이다. 일제침략기에는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됐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이인호 기자